신이 세계를 처음 만들 때는
아무데도 길을 내지 않았다
그래야 너희들이 스스로 내리라
이 그럴듯한 덫에 걸려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길을 내는 바람에
세계는 길 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가면 게가 어딘가
모두 가기만 할 뿐
아무도 돌아온 적이 없는 길
그게 길인지 아닌지 몰라서
사람들은 또 새로 길을 낸다
언제나 실종의 확인으로만 그치는 노역이
세계를 온통 상처내고 있는 길
노자 가로되
길을 길이라 하면 이미 길이 아니니라
/이형기, 『죽지 않는 도시』, 고려원, 1994, p.93
지난 19일부터 기억이 없다. 책 한 줄 읽지 못하는 날들. 아팠다. 열심히 아팠다. 정신줄 놔버릴 정도로 아파했다. 이렇게 아파도 되는 것인가 싶게 아팠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왜 아프기 시작했는지 알고 있지만 기억을 되새기긴 싫다. 그냥 열심히 아파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열로 열심히 땀 흘리며 아파했다. 아프기 위해 눈을 뜨고, 아프기 위해 잠을 자고, 아프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치열하게 아팠다. 진정 이렇게 열심히 아파해도 되나 싶게 열심히 아팠다. 그리고 어제, 모든 의식의 끝은 酒님으로. 조지훈님의 사모를 읊조리며,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 자신을 위해......' 좀 유치한가? 유치해도 어쩔 수 없다. 난 지금 좀 어리고 또 어리고 싶으니까.
7시가 넘었는데도 창밖은 깜깜하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어둠. 새벽부터 이형기님의 시집을 뒤적거렸다. 열심히 끼고 다니며 열심히 필사를 하고 열심히 외웠던 시집. 어릴 적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늙나 보다. 다시 읽어도 좋고 또 좋고 더 좋다. 시집이 읽히는 것을 보니 이제 아프지 않나 보다. 아프고 싶지 않다.
7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도 깜깜하다. 오늘은 지구가 자전을 해야 하는 것을 잊은 것일까? 아침이 오지 않으면 무얼 해야 하나? 시간이 더디도 흐른다. 시간을 아까워하며 보내는 시절이 좋은 것 같다. 열심히 몰입하는 시간. 늘어지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열심히 해야 할 일이 현재는 없다. 나 역시 기를 쓰고 길만 내며 살고 있는 것일까? 만족할 줄도 모르면서 언제나 과하게 살고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모를 수밖에 정답은 없으니까. 아침이 오나보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나 닦으러 가야겠다. 감사하게도 지구는 오늘도 잊지 않고 자전을 했구나. 또 돌았어. 지구는 돌고 있다고. 다행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