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QUID LOVE
이처럼 이합집산을 자유자재로 하는 이 모든 것은 자유를 향한 충동과 소속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 그리고 이 두 가지 갈망이 빠르게 바뀌는 것을 완전히 보상해주지는 못해도 감추는 것은 가능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열망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소진시키는 '네트워킹'과 '네트워크 서핑' 작업 속에서 해소되고 한데 섞인다. '마당발'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처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열망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느라 골머리를 싸매고 기를 쓴다. 그것이 외로움과 헌신, 또는 배제라는 재앙과 너무 강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유대, 회복할 길 없는 분리와 돌이킬 수 없는 애착이라는 두 암초 사이를 안전하게(또는 적어도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지 않고)항해하는 방법을 약속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채팅하며, 함께 채팅할 친구('버디buddy')들이 있다. 채팅 중독자는 모두 알고 있듯이 버디들은 왔다 가고, 접속했다 접속을 끊는다 - 하지만 항상 '메시지 교환'으로 침묵을 잊으려고 몸이 근질근질한 사람들이 일부 접속해 있다. '버디-버디'류의 관계에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오고 가는 것, 즉 메시지의 유통 자체가 메시지이다 - 내용은 신경 쓰지 말라. 우리는 속해 있다 - 말과 불완전한 문장의 대등한 흐름에 말이다(분명히 유통 속도를 늘리기 위해 말끝을 생략하는 등 축약형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그저 말을 하는 것이지 무슨 말을 하는가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늘날 마치 강박증에 걸린 듯 고백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것과 30년 전에 세넷이 우려한 바 있는 신뢰의 남발을 혼동하지 말라. 무슨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목적은 더 이상 영혼의 내면을 상대방이 가만히 살펴보고 동의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말이나 문자로 보내는 단어들은 더 이상 정신적 발견의 여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모스Chris Moss가 훌륭하게 표현했듯이 (『가디언 위크엔드』) "인터넷 채팅이나 휴대폰 통화 그리고 휴대 전화를 이용해 24시간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텍스팅〕에서 내적 반성은 정신없이 이루어지는 하찮은 상호작용으로 대체되는데, 그것은 쇼핑목록과 함께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을 드러낸다."하지만 여기에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일단 채팅이 계속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한다면 정신없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러한 '상호작용'은 그의 말만큼 하찮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인터넷 접속자들은 결합의 신성함을 축성하기 위한 사제들이 아니다. 그러한 결합에서는 채팅과 텍스팅 말고는 아무것도 기댈 것이 없다. 그것은 오직 전화를 걸고, 통화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한에서만 유지된다. 말을 끝내면 당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배제와 동의어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데리다가 한 말의 본의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이긴 하지만…….
p.95~96.
사람들은 왜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사적 공간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인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확인받으려 하는 것인지. 사람들과 주고받는 무게감 없는 단답의 말들이 싫다. 형식적 의무감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어서 sns를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들의 가벼운 일상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노출증 걸린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있다. 왜 자신의 사적 공간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더구나 편집하거나 미화해서. 배제당할까 두려워서 일까? 나는 존재하는데 무엇을 더 확인받으려 하는 것일까? 형체 없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고독을 즐길 수는 없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공허, 깊은 공허. empty!
통계와 평균과 다수에 매달리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는 전쟁의 비인간성의 정도를 사상자 숫자로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악惡, 잔혹성과 공격성 그리고 희생의 참혹함도 희생자 숫자로 평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인간이 저지른 가장 참혹한 전쟁의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인 194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어떤 고통의 울부짖음도 한 사람의 울부짖음보다 더 클 수 없다.
또한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
지구 전체라도 한 영혼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p.193.
수치로 표현되고 평가되는 자살, 빈곤, 난민, 실업, 기아 그리고 전쟁과 테러에 의한 부수적 피해들...
인간에 의해 사육되고 소비되는 농장동물의 수와 환경난민이 되어 지구별을 떠도는 생명들, 또는 멸종되는 생명들의 수...
도대체 인간은 지구별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권리로?
기억은 복합적인 축복이다. 더 정확히는, 합쳐져 하나로 만들어진 축복이자 저주이다. 기억은 많은 것을 '계속 살아 있게'한다. 한 집단과 그의 이웃들에게는 첨예하게 불균등한 가치를 가진 많은 것들에 대해. 과거는 한 묶음의 사건들로, 기억은 결코 그것들을 모두 담지 않으며, 그것이 담거나 망각에서 되찾아낸 것은 어떤 것이든 '원래 그대로'(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말이다)의 형태로 재생되지 않는다. '과거 전체'와 원래 벌어졌던 그대로wie es ist eigentlich gewessen의 과거(랑케Lanke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바로 과거를 그렇게 다시 들려주어야 한다)는 결코 기억에 의해 되찾을 수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기억은 살아 잇는 자에게 자산이 아니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기억은 선택하고 해석한다. -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해석할지는 끊임없는 논란과 논쟁의 대상이다. 과거를 부활시키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기억의 적극적인, 즉 선택하고 재처리하고 재활용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LIQUID LOVE』, 새물결, 2013, p.203.
축복이자 저주인 기억. 우리는 어제 일을 안다고 말하지만 알지 못하고, 내일을 예측한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고 임박한 파국을 회피하려 드는 성향이 짙다. 역사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욕망. 권력과 물질에 대한 욕망. 탐욕. 욕망하는 인간도 자연일까?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文明'이라는 것이 진정 '발전發展'일까? 휴-
올해 들어 고민하던 것들에 대한 해답을 기대를 하고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고 나니 더 복잡해졌다. 단순한 것이 아닌, 모두가 피해자라는 생각도 들고. 잘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왜 바우만을 구루guru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다. 놀라운 통찰과 흡입력 있는 문장. 바우만의 책을 읽고 나면, 한 번 더 읽고 싶어지고 주변 사람들이 읽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책에 대한 수다를 나눌 사람이 없다.
한 동안 통계내고 분석하는 과제로 우울하게 지냈다. 과제를 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통계내고 작품을 분석하는 짓따윈 하고 싶지 않다. 엉망으로 제출한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진정 하고 싶지 않은 과제였으므로......ㅡㅜ. 책도 읽히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현재, 나는 나로 돌아가고 있다.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를 들락거리며, 질러놓은 책을 기다리며, 바삭거리는 쿠키를 씹어먹듯 책을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다. 으흐. 이럴 땐 좀 행복하단 생각도 든다. 좀, 쫌, 아주 쫌!! 그리고 졸리다. 커피커피 커피가 필요한 시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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