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비가 내리던 날, 어딘가로 떠밀려 가는 나의 환영을 본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침대 위에 집어던진다
그의 마음속에 가득찬, 오래 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절그럭거린다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곳까지 열심히 걸어왔었다, 시무룩한 낯짝을 보인 적도 없다
오오, 나는 알 수 없다, 이곳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내 정체를 눈치챘을까
그는 탄식한다,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모퉁이에서 마주친 노파, 술집에서 만난 고양이까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여행자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p.36.
간혹 생각한다. 나는 내 방 책장 밑에 깔려 죽어있는데, 아직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아 계속 살아있는 척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바람과 비에 직면하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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