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이 - 우리의 생각과 느낌 역시 - 어느 정도까지 진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깨닫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의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에 자리를 내주었고,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양심의 권위가 건강한 인간 이성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응에 도달하였다. 공개적 형태의 낡은 권위를 벗어던진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권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다. - p. 102,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에리히 프롬 -
착각과 순응에 갇힌 인간은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무기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셸 푸코의 말처럼 지식은 권력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이 지식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사회를,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빅마우스들. 진실을 전달한다고 자처하는 언론과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 팬들에게 사랑받는 연예인 등. 우리는 그들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지식과 가치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들의 포장된 모습이 진실인 양 착각한다. 이는 수구와 진보를 떠나 같은 양태를 보인다. 빅마우스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특정 시공간에서 그것은 권력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식과 가치, 진리는 가짜 일 수 있다. 진짜처럼 꾸며 놓은 가짜 이거나 진짜처럼 행세하는 가짜 말이다.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물러서고,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신화를 신봉한다. 직면한 개인의 불안과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향원(鄕愿)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신격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무서운 것은 그 신념을 수용하지 않거나 신화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다. 차이를 넘어 증오로 표현되는 행태들 말이다. 세상의 모든 가치는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고 그 의미를 갖는다. 민주적인 토론이란 내가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과 동등하게 상대방의 가치와 이론에 설득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을 때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대화를 시작하는 시대는 요원한 것일까?
문득, 조르바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알아듣겠소?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p.69, [그리스人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아니, 왜? 그러게 왜일까? 나는 회의주의자인가? 읔!? 모르겠다. 지구별에서 산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