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도 사랑이란 타자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피치노는 사랑하는 자가 다른 자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만 이러한 소멸과 망각 속에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되찾고", 심지어 "소유"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유는 곧 타자의 선물일 것이다. - p.59,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
새벽 3시, 창으로 비추는 달소리로 잠을 깨는 일은 멋진 일이다. 그리고 한참을 핸드폰에 들어앉은 문자를 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즘 자주 혹-한다. 아니 기쁨과 슬픔의 공존. 喜悲가 늘 나의 뇌의 어디쯤, 심장의 어디쯤을 차지하고서 날 놓아주지 않는다. 모든 사고를 통제하는 것 같다. 창으로 비추는 달소리에도 혹-하게 하고, 단 몇 개의 단어에도 혹-하게 한다. 기쁨과 슬픔, 때론 진창으로 혹-하기를 반복하게 한다. 나는 자꾸 소멸하고 다른 누군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나의 모든 감각과 사고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느끼고 사고하는 것 같다. 피치노의 말처럼 내가 다른 자아 속에서 나를 망각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다시 나를 되찾고 본래의 자아를 소유하는 기분이다. 아니다. 한병철의 멋진 말에 혹-해서 다시 이런 말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확실치 않다. 그러나 분명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사유하게 된 것 같다.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다른 내가 된 것처럼. 나의 의식과 무관하게 혹-하고 一喜一悲한다.
긴장하며 살고 싶다. 사무치게. 지구별에 존재하는 그날까지...... 다른 내가 된 것일까? 지구별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잊은 듯하다. 잘 모르겠다. 책이나 읽어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