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픔





[20200725, 바람부는 날]





묘비명

- 미카 동지, 여기 잠들다


그대는 다행스럽게도 하필 이 숲속을 지나는구나.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내가 외롭게 쓸쓸하지 않도록

하얀 눈 위에 어머니의 자궁 같은 발자국까지 남기며

하염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구나.

한숨과 분노와 눈물이 마른 동지들이 나를 묻어주고

내 가슴에 가느다란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들꽃들이

그 어느 곳보다 찬란한 슬픔을 피우는 여기에

그대여, 잠시나마 더 머물러주오.


살아있는 자들이 더 슬프다는 걸 내 모르지 않으며

내 또한 내 죄 많은 인생을 모르지 않으며

동지들 또한 동지들의 죄 많은 인생을 모르지 않으며

그 많은 죄들로 인해 먼저 한줌 재로 돌아간

빨치산 대원인 나, 미카는

내 젖은 무덤에 흙이 마른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슬픔이 자라 꽃으로 피어날 때도 얼마 남지 않았다오.


비록 짧은 세월이지만 난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용서나 기도 같은 걸 바란 적이 없다오.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역시 죽은 자가 하는 것이므로

그 또한 바란 적이 없다오.

그대에게 거듭 말하노니 제발 나를 용서치 말기 바라오.

단지 이 죄 많은 인생이 바라는 게 있다면

내 영혼이 늦가을 홀로 자작나무숲을 거닐 자유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무덤 위로 별들이 뜨고 지고

철따라 풀꽃들이 끝없이 피고 지는 것이라오.

그리고 행여 따뜻한 세상의 가슴이 나에게로 온다면

내 영혼이 하얀 자작나무 속살처럼 거듭나는 것이라오.


-프리모 레비, 『살아남은 자의 아픔』, 노마드 북스, 2011,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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