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20211227 - 20220124]

 

 

 

  사물이 우리의 시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시선이 통과하는 진로 밖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과 눈을 그 사물에다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눈이든 또 그외의 어떤 젤리성 물질이든 그 자체에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얼마나 멀리 그리고 넓게, 또는 얼마나 가깝게 그리고 좁게 보아야 할지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많은 현상 중 아주 많은 부분이 평생 우리 자신으로부터 가려져 있다. 
  정원사는 오직 정원사의 정원밖에 보지 못한다. 경제학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져주지는 않는다. 자연 경관에서는 우리가 감상할 마음의 준비가 된 만큼의 아름다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외에는 눈곱만큼도 더 볼 수 없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시민의 불복종』, 이레, 1999,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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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07,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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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적 표현의 진정성에 대한 '전문가적 판단'이라는 것이 있는가? 여기에도 더 '나은' 판단을 하는 사람과 더 '나쁜' 판단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더 정확한 진단은 인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의 판단에서 나온다. 
  이 지식을 배울 수 있는가? - 그렇다. 일부는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수업을 들어서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이다. - 이 점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생이 될 수 있는가? - 물론 가능하다. 그는 수시로 다른 사람에게 올바른 보조 지식을 준다. - 여기서 말하는 '배움'과 '가르침'은 그런 것이다. - 여기서 얻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배운다. 여기에는 규칙도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지는 않으며, 경험이 있어야 그런 규칙을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은 계산자와는 다르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 무한 정성을 단어에다 올바르고도 반증 불가능하게 적용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떠어떠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시늉만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거에 의거해 확신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증거'에는 '계량 불가능한' 증거가 포함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계량 불가능한 증거가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실체의 화학적(내적인) 구조에 대한 계량 불가능한 증거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계량될 수 있는 어떤 결과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 
  (우리는 계량 불가능한 증거에 입각하여 하나의 그림이 진본임을 누군가에게 확신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료적 증거에 의해서도 옳은 판단임이 입증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계량 불가능한 증거에는 눈빛이나 몸짓, 어조의 미묘함이 포함된다.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눈길을 알아보고, 그런 척만 하는 눈길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물론 내 판단을 '계량 가능하게' 확증하는 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차이를 묘사할 길이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는 언어에 그것을 묘사할 말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면 되지 않는가? 내가 아주 재능이 뛰어난 화가라면 나는 그 진정한 눈길과 시늉만 하는 눈길을 그림에서 구별 가능하게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문해보라. 무언가를 알아내는 '직감'을 얻는 법을 어떻게 배우는가? 또 이 직감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 《철학적 탐구》, 제2부 - 레이 몽크,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웅진지식하우스, 2007,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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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현실이다. 고통에는 현실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주는 저항이 있을 때 현실을 지각한다. 진통사회에서의 지속적 마취는 세계를 탈현실화한다. 디지털화 또한 갈수록 저항을 축소시키며, 저항하는 상대, 대립, 대립체를 점점 더 소멸시킨다. 지속적인 좋아요는 둔감함을, 현실의 해체를 낳는다. 디지털화는 무감각화다.
  가짜뉴스와 딥페이크가 존재하는 탈사실적 시대에는 현실에 대한 둔감성, 나아가 무감각성이 생겨난다. 우리를 이로부터 빼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고통스러운 현실충격뿐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패닉 반응은 부분적으로 이 충격 작용에서 비롯된다. 바이러스가 현실을 복구한다. 현실은 바이러스라는 대립체의 형태로 자신의 복귀를 알린다. 
  고통은 자기 지각을 강화한다. 고통은 자아의 모습을 드러낸다. 고통은 자아의 윤곽을 표시한다. 증가하는 자상행위는 나르시시즘적이고 우울에 빠진 자아가 자신을 확인하고 느끼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나는 고통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실존감 또한 고통이 있어야 가능하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면 고통을 대체할 다른 것을 찾게 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고통이 구제책이 된다. 익스트림 스포츠와 모험적 태도는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려는 시도들이다. 이렇게 진통사회는 역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문화가 없으면 야만이 생겨난다. "무감각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생동감을 주려면 점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여전히 자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극들로는 이제 마약, 폭력, 테러만 남아 있다." p.53.

  이제는 전체주의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디지털 감시권력은 이미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념을 궤멸시키고 있다. 인간의 인격이 이윤을 낳는 데이터 기록으로 강등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감시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다. 감시는 자본을 낳는다. 우리는 디지털 플랫폼들에 의해 상시적으로 감시되고 조종된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도가 선별되고 착취된다. 사물인터넷은 감시를 실제 삶으로 확장한다. 웨어러블 장치들도 우리의 몸을 상업적 활용에 내맡긴다. 우리는 알고리즘의 끈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조종된다. 빅데이터는 심리정치적 도구로서 인간의 태도를 예측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꾼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우리를 자유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인구조사가 이루어지던 시대에는 아직 데이터 수집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사람들은 인구조사 뒤에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감시국가가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되돌아보면 당시에 수집되던 데이터들은 학력과 직업 혹은 종교와 같은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들까지 격렬한 시위에 나섰다. 반면 지금 우리는 내밀한 개인적 데이터들까지 자발적으로 내놓고 있다. 강제가 아니라 내적 욕구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 우리를 구석구석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한다. 지배는 자유와 일치하는 순간 완성된다. 여기서 자유의 변증법이 일어난다. 자유의 표현인 무한한 소통이 총체적 감시로 변한다.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김영사, 2021, p.88.

 

 

 

 

 

 

 

 

통증, 몸에서 곡-소리가 들린다. 아프다.

... 겨우 책만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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