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으로도 이름 부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당신에게 해야겠다
내가 당신을 불러야 할 호칭은
이제껏 무엇으로도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이겠지만
형이라 부르면 좋겠으나 형이라 부르지 않겠다
누나라 불러도 아버지라 불러도 무방하겠으나
어머니라 부르지도 않겠다
선생이라 불러 식음(食飮)하는 일의 준비를 한다 해도 좋고
당신 앞의 쓸 만한 꽃이 되어도 좋겠다 싶지만
그렇게도 않겠다
사막에 혼자 갔을 때 봤듯이
그곳의 사라진 돌 바위들과
그것에서 사라진 거대한 무덤들과
그리고 이미 그전에 사라져버린 왕조까지도
모두 모래가 되었다
사랑을 앞세워
무엇도 이름하지 않으리라
지금들, 그리고 여러 많은 광채들
그뿐
무엇이더라도 필요치 않으니
당신은 그대로 가만있으라
- 「자유의 언덕」,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2020, p.92.
모래 바람 속 누란에 앉아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내게 유일한 春光乍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잊히는 연습을 한다. 잊히고 또 잊히면 나는 이런 나를 놓아줄 수 있을까?